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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요 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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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김경식, 「경상북도 문경지역 도자제작의 역사와 사기장인의 역할」, 『한국도자학연구』, 한국도자학회, 2017

6代

1894 년 출생

金 敎 壽 [김 교 수]

1894~1973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6대 김교수, 1972.

6대 김교수는 광주 분원[분원공소, 분원번자회사]의 해체 이후 문경으로 귀향하여 이곳에서 왕실용 조선백자를 제작하던 분원 사기장의 맥을 이어가고자 했다.

문경지역에서 계승되어 온 전통가마와 광주 분원의 정제된 제작기법 간의 접목을 통해 정교하면서도 고유의 지방색이 가미된 청화백자를 창출해 내었다.

지역적·시대적 요인으로 인해 고급 안료확보의 어려움과 수요층 확보의 한계에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양한 기형과 문양의 청화백자를 제작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조선말기 분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역경의 세월을 온 몸으로 겪어낸 김교수는 조선의 마지막 사기장으로, 1960년대 중반 정호다완 재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장인이다.

“백산 김정옥의 선친 김교수 사기장의 광주 분원에서의 행적과 이후 광주 안옥희 공장을 비롯한 문경도자기 조합에서의 물레성형장인으로서의 활동내역은 김정옥 사기장의 증언과 관련 문헌 기록을 토대로 2016년 개관한 <문경 국가무형문화재 사기장 전수관>의 제1전시실(9대를 이어온 백산가문의 역사전시실)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후 2017년에 유물 분석작업과 문헌기록을 추가로 정리하여 김경식이 단국대학교 박사수료 후 한국도자학회 연구논문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1899년

6대 김교수는 6세의 어린 나이에 조선말기 왕실용 백자
제작을 담당했던 분원分院[분원공소分院貢所, 분원번자
회사分院燔磁會社]의 물레장인으로 발탁된 선친 김비안
사기장을 따라 경기도 광주 분원으로 상경했다.

1902 ~ 1905년

김교수는 선친 김비안과 함께 분원번자회사에서 어려서
부터 물레성형법을 비롯한 여러 기술을 익혔다. 1902년
분원번자회사에서 시행한 유소년 도자제작 교육과정에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다.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18X25.5cm,
1880년대~1900년대 초

도자기 판매시장, 20세기 초

1910 ~ 1915년

1915 ~ 1930년

1940년대

청화백자초화문호靑畵白磁草花文壺
6대 김교수(金敎壽, 1894`1973) 作, 백산 김정옥 소장

청화백자포도넝쿨문호靑畵白磁葡萄넝쿨文壺,
6代 김교수(金敎壽, 1894~1973) 作, 백산 김정옥 소장.

1950 ~ 1960년대

6.25 전쟁 이후 자기 제작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저가의
양은식기 출현으로 인해 반상기 수요가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사발, 대접보다는 호롱, 요강 등을 주로 제작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화분, 흑유 등도 생산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인들의
한국도자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전통적인 기법을 고수해
온 김교수의 작품들이 점차 재조명 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김교수의 아들 김정옥 사기장이 20대 중반의
나이로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전통물레와 가마 운용기법을
기반으로 하여 실질적인 가마 운영의 중심이 되었다.

7대 김정옥, 1956

7대 김정옥, 1959

7대 김정옥, 1966

1973년

김교수는 가문의 문양인 포도넝쿨문을 계승하여 아들 김정옥
에게 전수하였으며, 1960년대 중반 정호다완 재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6대 김교수, 1969

6대 김교수(좌),
일본인 도예가 고바야시 도오고(小林東五, 우), 1972

Tea Bowl. 정호다완井戶茶碗, 1960년대, 높이10cm × 지름15.5cm, 백산 김정옥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