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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김정옥 사기장의 삶과 도업

* 사진 및 자료정리 : 백산도자문화연구소

1960년대

가업을 이어받아 고된 수련의 길을 걷다.

“백산 선생은 노력가입니다.
보통 노력가가 아니라 대단한 노력가입니다.


그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으로는 논밭을 갈고 아침부터 밤이 늦도록 하루 종일 발물레를 돌렸습니다.
위로 두 분의 형님들이 있었지만 그는 장남의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는 항상 형님들을 내세워드렸습니다.


오늘날 백산 선생이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보낸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던지 항상 너무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 일본인 도예가 고바야시 도오고(小林東五, 1935~)와의 인터뷰 영상자료 중, 2012년 5월 12일-



“지게질이 가장 힘들었어.
나는 먼 산 두 개를 넘으며 마흔 두 살까지 지게질을 했어.”


그릇을 빚는 일은 사람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는 온전히 자연의 힘이다.
내가 빚은 그릇들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릇을 빚기 위한 흙이 그렇고 가마에 넣을 땔감인 소나무가 그렇다.
소나무는 땔감이 되기 위해 5년 동안 수분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그 5년 동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로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며 나는 좋은 그릇을 빚기 위해, 자연을 담기 위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


‘백산 김정옥 선생’의 삶에 대한 시인 이지혜 님의 글(문화재청, 문화재 사랑 2008, 5) 중 일부 발췌



1966

1966

1969

1972

2012

고바야시 도오고(小林東五, 1935~ )

제가 처음 백산 선생의 가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대 후반 백산 선생의 선친 김교수 (6대 김교수金敎壽, 1894~1973) 사기장을 뵈었을 때입니다. 그 분의 얼굴을 보자마자 저는 “이분이 바로 조선을 대표하는 사기장”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사기장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보았을 때 “이것이 바로 조선의 도자기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 두 부자와 저와의 만남은 정말 운명과 같았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많은 도예가들을 만났지만 백산 선생과 그의 선친 김교수 사기장을 만나고 내가 찾던 분이 바로 여기 있었구나 생각했습니다.